대학생 창업 후 겪었던 파란만장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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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사업을 시작하다....[2편]
영문과에 진학한 것은 사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을 배워야한다.’는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였지 내가 택했던 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문학은 나에게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는데, ‘영어’라는 언어를 접하게 된 계기 자체가 ‘힘든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영어를 접한 것은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서가 아니라 중3 영어연극대회를 준비하면서였고, 고등학교때에는 지나가는 외국인 가족에게 말을 건넨 뒤, 친해져서 일주일에 두 세번은 어울려 지냈다. 생각과 함께 행동을 저지르는 성향이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미국인 아버지, 콜롬비아에서 온 어머니,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어린 두 딸과 벚꽃구경, 소풍, 파티 등 한국에서 접할 수 없는 미국의 문화를 즐겼다.
영문과에 다니다가 휴학을 하니, 딱히 무엇을 해보아야 할 지 정할 수가 없어서, 영어를 한번 깊이 공부해보기로 한다. 정말 영어다운 영어, 수능과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배워보고 싶었다. 무작정 영어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목표가 있는 것이 더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 통번역을 공부해보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받아쓰기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16시간을 영어와 씨름하였다. 2개월쯤 되었을까? 스피킹 연습은 따로 할 수가 없어서 주제를 가지고 2~3분 혼자 중얼거리다가 전화영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모회사의 ‘20분’ 수업을 처음 수강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화영어 사업을 시작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첫 수업에서 Jem 강사님을 만났다.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명확하고 안정감있는 목소리의 여자강사님이었다. 필리핀 강사라고 말하지 않으면 몰랐을 만큼 발음도 아주 좋았다. 교재를 가지고 하는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폭풍 수다를 떨었고, 가정사, 연애사 같은 사적인 이야기, 약간 민감할 수 있는 종교 이야기까지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강사님 또한, 한국 학생들과는 항상 벽이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음..우리는 말그대로 Friend(아미고)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휴학을 한지는 4개월, 전화영어 수업을 한지 딱 2개월이 되었을 때, 회사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화영어 회사는 너무 영세한 업체들이 많아서 6개월도 채 못 버틴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거기다가 Jem의 하나뿐인 동생이 전반적 발달장애가 있는데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다리에 욕창이 생겨서 지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Jem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에 회사에서는 당장 다음 달부터 월급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회사가 문을 닫고 나서 스카이프 화상으로 하루에 3시간씩 통화를 하면서 동생도 이미 소개를 받은 터라, 발달장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시 내 수중에 과외비로 받은 60만원이라는 돈이 있어서 수술비로 쓰도록 필리핀으로 송금을 해주었다. 필리핀은 한국을 봉으로 안다고, 절대 빌려주지 말라는 말이 많았지만, 어차피 3~4시간씩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수업료라고 생각했고, 나의 멘토이신 아버지께서도 ‘사람을 도우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보내줄 수 있었다. 그렇게 Jem은 큰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고, 우리의 신뢰는 더 크게 쌓여갔다.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가, 다른 회사를 구할 동안 내가 학생들을 소개 시켜 줘보겠다고 했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리고, 테스트를 받게 하고 실제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생겨났고, 워낙에 실력이 좋았던 Jem은 그렇게 10명의 학생을 순식간에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회사로 가기 전까지 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수수료를 가져가지 않으니, Jem은 원래의 수입의 3배 이상을 벌었고, 그 소식을 들은 옛 동료들이 하나 둘 씩 나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Jem과 한창 주고받았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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